누구나 부자를 꿈꾼다. 나도 그렇다. 대학 때 경제학 개론을 교양 수업에서 듣고 이상한 학점을 딴 뒤 경제 공부를 제대로 한 적이 없다. 그래서?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내가 받은 경제 점수는 재미 있는 성적이었다. 부자가 되는 법, 부자 재테크, 성공하는 법 등의 분야의 책은 항상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고 있다. 역시 성공하기 위해서는 독서를 중요하다. 요즘은 인문학을 중점적으로 내세우는 경향이 있다. 인문 고전, 심리학, 철학 같은 책은 나를 위축시킨다. 나에게 인문학은 아직 발을 들여놓기 어려운 분야라고 생각했다. 그 중에는 역사도 포함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신·최 허, 윈스턴·처칠
단재 신채호(신·최 마)선생님과 영국의 윈스턴·처칠 경이 거의 같은 시기에 지구 반대쪽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순전히 우연의 일치가 아닌 것이다. 몇년 전부터 역사의 중요성에 대해서 언론에서도 많이 소개되고 인식이 크게 개선되었다. 다행히 저는 역사에 관심이 높았다. 단순히 이야기가 주는 단편적인 재미로만 한정한 것이 한계였지만.40세를 지나면서 다시 독서와 공부를 하려고 결심한 뒤에는 자기 계발, 심리학 공부법 등의 분야의 책을 많이 들여다보게 됐다. 공부에 전념해야 한다 10대나 꿈을 찾고 미래를 설계하는 20대나 배운 것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30대에 비해서, 앞으로 남은 인생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압박감 때문인지 더 직접적이고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조언을 찾는 책을 많이 보게 됐다.그러나 오늘 소개하고 싶은 이 책은 “부자가 되는 방법”등의 내용에 대표되는 자기 계발서도 아니고”월급쟁이 재테크 방법”등과 같은 내용의 실용적인 경제 경영서도 아니고 경제 법칙이나 경제 철학을 가르치다 주는 경제 기본서도 아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돈이 어떤 영향을 미쳤고,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우리는 그 중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서 다루는 책이다.
50대 사건으로 맡은 돈의 역사 표지, 제가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은 잘 보는 유튜브 채널에서 소개를 하고 준 탓도 있고 서점에서도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전시되어 있어 모른 채 지나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출판되고 곧 베스트 셀러가 됐다. 이 글 작성하는 현재의 시점에서 교보 문고, YES24등에서 종합 베스트 셀러 순위 2위에 올랐다.이 책은 총 7부로 나뉘며, 각부마다 5~8장으로 총 45장의 내용으로 구성된다. 이 글에서는 그 가운데 내 생각에는 중요한 사건을 중심으로 다시 재구성하고 전 3부작으로 사용하기로 생각한다.1번째 문장-전쟁과 돈의 상관 관계, 2번째 문장-인구가 산업 혁명에 끼친 영향, 3번째 문장-세계 대공황과 금본위 제도, 4번째 문장-한국과 일본의 경제
CHAPTER 1 전쟁과 돈의 상관관계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유럽 주요 강대국들의 패권 다툼은 치열했다. 16세기에는 스페인이 패권국가의 자리를 잡았고, 17세기에는 네덜란드가 암스테르담 은행과 동인도 회사라는 신무기를 앞세워 세계 바다를 호령했고, 18~19세기에는 영국이 무적 해군을 앞세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늘 2인자 자리에 머물며 영원한 도전자로 불렸다.
군사력보다 약한 경제력의 스페인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100여년간 스페인이 부강했다. 거대한 광산의 발견과 혁신적인 제련 기술을 받아들임으로써 막대한 부를 얻었다. 그러나 이는 곧 스페인의 저주로 이어졌다. 해외에서 돈과 은이 대량으로 유입하는 통화량이 늘었지만 국내 생산 능력의 한계에서 화폐의 가치가 낮아질 물가는 상승하게 됐다. 결국 네덜란드 같은 이웃 나라의 제품 경쟁력이 상승하면서 수입품이 늘어 많은 귀금속이 경쟁국으로 빠져나간다.
이런 현상을 “네덜란드 병”이라고 부르는데, 1959년 북해의 대규모 가스전 발견 이후 수출이 증가하는 수출 대금이 대거 유입되면서 네덜란드 화폐 가치가 크게 상승하는 천연 가스를 제외한 다른 산업은 경쟁력을 잃은 이처럼 자원 개발 후 오히려 국가 경제가 침체되는 현상을 “네덜란드 병”이라고 한다. 스페인에서 먼저 경험했지만 공교롭게도 “네덜란드 병”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 재미 있다. 이런 문제의 해결책은 금리를 올리고 경제 전체의 수요를 진정시키는 것이지만 당시 스페인에는 금리를 조정하는 중앙 은행이 없었다. 그는 당시 스페인을 지배하던 합스부르크가의 왕들은 통화 긴축는커녕 대규모 전쟁을 일으키고 사태를 악화시켰다.스페인 왕실은 오스만 터키 제국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재정적으로 파산하게 되고 용병 부대에 월급을 지불하지 못 했다. 결국 용병 부대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인 앤트워프를 약탈하고 7천명 이상의 시민을 살해하고 도시를 폐허로 했다. 당시 네덜란드는 종교적 차이로 남부와 북부에 엇갈렸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남부 상인과 지식인들은 스페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북부와 협력하는 “엥토 협약”을 체결하고 네덜란드 독립을 이루다. 네덜란드의 금융 제도가 발전한 이유 네덜란드는 육지의 대부분이 바다와 늪 지대에 개간을 통해서 만들어진 땅이다. 교회와 귀족이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어렵고 직접 개척하거나 개간한 토지는 자유롭게 매매했다. 이런 개방적인 풍토가 사업을 시작하는데 좋은 토양이 됐다. 그러나 당시의 사업은 무한 책임을 원칙으로 하며 쉽게 사업에 참가하기 힘든 구조인 사회가 발전하는 복잡하게 되는 사업을 방해한다는 인식이 퍼졌다. 특히 대항해 시대가 열린 유한 책임을 기본으로 사업을 오랫동안 줄 새 제도가 필요하다, 주식 회사가 나타나게 됐다.당시 남부 네덜란드는 스페인이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막대한 세금을 부과하고 반란이 잦다 보니 정부 차원에서 해외 진출을 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해외 시장을 오랫동안 개척하는 민간 자본을 육성해야 했기 때문에 세계 최초의 주식 회사인 동 인도 회사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조직은 소유권이 경영권과 분리되어 중요한 의사 결정은 선출된 이사가 내리고 투자가는 그들의 결정을 수용하거나 주식을 팔것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해외 교역에 의해서 다양한 화폐가 유통하고 상인 사이에 실무적인 문제가 초래되면 네덜란드 연합 주는 1609년 암스테르담 은행을 설립했다. 아무리 정부가 세워진 은행이라고 해도”언제든지 돈을 찾을 수 있다”이라는 확신이 없으면 사람들은 은행에 돈을 맡기지 않는다. 암스테르담 은행은 예금을 귀금속으로 바꾸고 100% 가까운 준비금을 비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뢰를 얻고, 상거래의 편리성을 높이게 됐다. 17세기 세계 경제의 패권을 네덜란드가 잡은 것은 이런 금융 혁신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네덜란드병’이라고 부르는데 1959년 북해의 대규모 가스전 발견 이후 수출이 증가하고 수출대금이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네덜란드 화폐가치가 크게 상승하고 천연가스를 제외한 다른 산업은 경쟁력을 잃었다, 이렇게 자원개발 후 오히려 국가경제가 침체되는 현상을 ‘네덜란드병’이라고 한다. 스페인에서 먼저 경험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네덜란드병으로 불리는 것이 재미있다. 이 같은 문제의 해결책은 금리를 올려 경제 전체 수요를 진정시키는 것인데 당시 스페인에는 금리를 조정할 중앙은행이 없었다. 더욱이 당시 스페인을 지배하던 합스부르크가의 왕들은 통화긴축은커녕 대규모 전쟁을 벌여 사태를 악화시켰다.스페인 왕실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재정적으로 파산하게 되면서 용병부대에 급료를 지급할 수 없었다. 결국 용병부대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인 앤트워프를 약탈하고 7천 명 이상의 시민을 살해하고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종교적 차이로 남부와 북부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남부 상인과 지식인들은 스페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북부와 협력하는 ‘엔트 협약’을 체결해 네덜란드 독립을 이룬다. 네덜란드의 금융 제도가 발전한 이유 네덜란드는 육지 대부분이 바다나 늪지로 개간을 통해 만들어진 땅이다. 교회나 귀족이 소유권을 주장하기 어려워 직접 개척하거나 개간한 토지는 자유롭게 매매하였다. 이러한 개방적인 풍토가 사업을 시작하기에 좋은 토양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사업은 무한책임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 쉽게 사업에 뛰어들기 어려운 구조여서 사회가 발전하고 복잡해져 사업에 걸림돌이 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특히 대항해 시대가 열리면서 유한책임을 기본으로 사업을 오랫동안 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가 필요하여 주식회사가 나타나게 되었다.당시 남부 네덜란드는 스페인이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고 막대한 세금을 부과해 반란이 잦았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해외 진출을 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해외시장을 오랫동안 개척할 민자를 육성해야 했기 때문에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인 동인도회사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조직은 소유권이 경영권과 분리돼 중요한 의사결정은 선출된 이사가 내렸고 투자자는 이들의 결정을 받아들이거나 주식을 팔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해외 교역으로 인해 다양한 통화가 유통되고 상인들 사이에 실무적인 문제가 초래되자 네덜란드 연합주는 1609년 암스테르담 은행을 설립했다. 아무리 정부가 세운 은행이라고 해도 ‘언제든 돈을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이 없으면 사람들은 은행에 돈을 맡기려 하지 않는다. 암스테르담 은행은 예금을 귀금속으로 바꾸고 100% 가까운 준비금을 비축해 신뢰를 얻어 상거래 편의성을 높이게 됐다. 17세기 세계경제 패권을 네덜란드가 쥔 것은 이 같은 금융혁신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영국은 어떻게 불패의 해군을 육성할 수 있었을까? 19세기 초 프랑스는 영국과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프랑스는 영국보다 영토도 넓고 인구도 많고 경제력도 높아 국민 총생산도 2배 이상이었다. 그러나 영국에 패권을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 제독이 프랑스, 스페인 연합 함대를 완벽하게 무찌르고 제해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 제독이 탑승한 기함 HMS빅토리 호 1척을 건조하려면 현재 가치로 환산한 지 110억원을 넘는 비용이 필요하다. 더구나 대포의 생산 및 병사의 인건비는 제외된 금액이다. 영국은 엄청난 비용을 어떻게 유지했을까?
노벨 경제학 상 수상자인 더글러스·노스와 배리, 와인 가스트는 1688년 명예 혁명을 기점으로 영국 국채 금리가 급격히 떨어지면서 프랑스 등 적대국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명예 혁명 이전 영국은 금리가 높았다. 영국 왕실이 자주 채무 불이행을 했기 때문이다. 찰스 1세가 전함 건조를 위해서 특별 세금인 전함세를 부과하고자 귀족과 금융업자의 반발을 사고,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군에 의해서 처형되는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게 됐다. 그 뒤 공화제가 수립되었지만, 크롬웰의 사후 왕정이 복고됐다. 선대 임금의 잘못을 그대로 모방한 제임스 2세가 자의적으로 세금을 매기면 결국 명예 혁명을 통해서 제임스 2세를 몰아냈다. 영국 의회는 네덜란드의 윌리엄 3세와 메리 여왕을 공동 국왕에 앉힌 뒤 세금을 징수할 때에는 의회의 동의를 받아야 하고 국민의 재산을 자의적으로 강탈하지 않기로 약속(=권리 장전) 됐다. 그 후 영국 왕실은 한번도 원금과 이자를 연체하지 않았다. 또 윌리엄 3세는 1만 4천의 군사와 수많은 기술자와 금융 인력을 데리고 사람과 함께 네덜란드의 생각과 금융 제도까지 영국에 간것이다.이런 변화에 1690년까지는 10%이던 영국 국채 금리가 1702년 6%로 낮아지고 1755년에는 2.74%를 기록하고 어떤 경쟁 국가들도 꿈에도 생각지 않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됐다. 영국 해군과 육군 전력 상승으로 이어졌다. 금리 하락은 만기가 없는 영구 채권에 투자한 영국인이 노후를 편하게 설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믿음”자본 시장의 형성으로 전 세계 투자가가 영국 런던에 오도록 했다. 명예 혁명이 미친 영향력 1688년에 일어난 명예 혁명은 사망자가 없는 무혈 혁명인 것에서 “명예 혁명”이라 불렸다. 권리 장전을 통해서 국가와 개인의 관계가 개인의 권리 중심으로 재정리하고 권리 장전의 조세와 대표권에 대한 내용은 미국 독립 혁명의 토대가 됐다. 또 차티스트 운동과 여성 참정권 등으로 대표되는 참정권 확대 운동도 명예 혁명과 권리 장전에 촉발된 것으로 여겨진다. 궁극적으로 명예 혁명은 산업 혁명에 영향을 주고 영국이 세계 최초로 근대 시민 사회로 이행하는 토대가 된 것 같다. ▲ 영원한 도전자=프랑스의 패배=프랑스는 심각한 재정난에 따른 채무 불이행이 반복됐다. 프랑스 왕실이 엄청난 부채에 시달린 것은 전쟁 때문이었다. 미국 독립 전쟁에 참가하고 20억 리울 자금을 썼다. 이미 국민의 조세 부담 비율은 31%에 이르고 있어 빚을 메우는 데 세금을 더 징수하지 못 했다. 프랑스 왕실에는 두가지 대안이 있었다. 하나는 특권 계층에게도 세금을 물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중앙 은행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특권 계급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이때 스코틀랜드 출신의 “존·로 “이 나타나는 왕립 은행을 설립하는 정부가 화폐 발행을 독점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이미 프랑스 왕실이 여러 차례 파산하는 이자 지급을 중단한 전력이 있어 중앙 은행을 설립하고 지폐를 발행하더라도 민간에 통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존·로는 미시시피 회사를 설립하고 프랑스 해상 상업적 권리를 독점하고 결국 왕립 은행과 합병하고 중앙 은행을 만든다.
정부를 화폐를 발행하고 부채를 척결하고, 미시시피 회사 주식은 급등했다. 그러나 프랑스 왕실 관계자가 주식의 차익 때문에 배신을 먼저 자금을 회수하면서 주가는 순식간에 하락했다. 이후 거래까지 중단됐으며 존·로는 중앙 은행장의 자리에서 해임되고, 프랑스 중앙 은행을 만들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프랑스가 16세기 이후 영원히 2위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재정 전쟁”에서 패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서양보다 잘 살던 중국 눈은 가정제 때 사상 최악의 왜구 침탈을 경험했다. 이를 “가테이대 왜구”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왜구는 일본인을 뜻하는 깃발보다는 “해적”을 가리키는 말 왜구의 구성원은 중국 상인이 대부분이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해외 무역을 독려했지만, 명나라 홍무제가 해금 조치를 내렸다고 해도 영락 때는 정화 대 원정을 지원할 만큼 대규모 무역을 추진하고 왔다. 그런데 가정제가 해금 정책을 엄격히 시행하고 수백척의 무역 선박을 파괴하는 밀수 상인을 처형했다.가정제 사망 후, 루우 경제가 장저우항을 개방하고 해외에 나온 중국인 무역을 허가했다. 또 지방 정부는 포르투갈이 마카오의 땅을 조종하는 일을 승인한 뒤 왜구의 습격도 급격히 감소했다. 그러나 이미 잦은 왜구의 침탈과 북방 정세의 악화로 재정 부담이 크게 증가했다. 이때,만력사이 초기의 명재상이었던 장·고죠은이 각종 세금을 토지세 하나로 단순 화해 세금을 모두 은으로 받은 일조 편법을 단행했다. 장 거정의 개혁은 국가 위기 국면에서 치러졌다.그러나 귀금속을 화폐로 사용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정적 공급이다. 은이 부족하고 공급 차질이 생기면 돈의 가치가 상승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저축 성향이 높아지면 경제 전반에 강력한 경기 위축이 발생하는 것이다. 중국이 일조 편법을 단행하고 은화 부족 사태를 겪고 있을 때 스페인의 대규모 선대가 중국에 도달했고 도자기나 비단 등을 은화로 구입함으로써 중국의 귀금속 문제가 해소된다.
일조 편법의 시행과 잇따른 해외 교역을 통한 “귀금속 공급 확대”덕분에 명은 막대한 재정 흑자를 기록했기 때문에 북방을 끊임없이 침략한 몽고 제국과 평화 협정 체결이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동양과 서양의 사회 발전 지수를 보면 동양이 서양보다 지속적인 우위를 기록했지만 18세기 말에 역전된다. 아케가 북방의 만주족에 의해서 멸망한 이유, 전술한 것처럼 조세 개혁을 통해서 부강한 나라가 된 명은 이 자리 손 등이 주도한 농민 반란으로 멸망하게 된다. 명나라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난 이유는 명나라 황제들이 잘못된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버드 대학의 티모시·브룩 교수는 기후 변화가 명나라의 멸망의 집적적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약 500년 전 소빙기로 불리는 지구 규모의 기온 하락이 있었다. 홍수, 한파, 가뭄, 메뚜기 떼 등 막대한 자연 재해가 폭풍처럼 밀려왔다. 명나라 만력 축제 때”만력의 늪”이라는 2회 자연 재해가 있었다. 첫번째”바이스의 늪”는 나가이 정의 개혁 이후, 은이 넘치던 시기였기 때문에 적절한 대응이 생겼지만, 두번째”바이스의 늪”가 발생했을 때는 바이스제가 재정을 낭비한 데다, 이민족의 잦은 침입으로 전략의 기반인 역 삼제가 붕괴된 상태였다. 명은 멸망시킨 농민 반란의 머리인 이·자 그는 원래 역참에서 일했지만 해고된 반군에 뛰어든 인물이었다. 청나라 때 인구가 급격히 증가한 이유 청나라가 3번의 난을 진압하는 중국 전역을 장악한 뒤 과거의 제도를 부활시켰고 농촌 지배 계급을 지배 구조 내로 끌어들여세금 제도도 점진적으로 개혁했다. 옹정제는 지정 숨김제, 즉 인두세와 토지세를 통합하고 세금을 부과하는 조치를 취했다. 갑자기 인구가 증가한 직접적인 이유는 행정 통계에 집계된 수가 늘어난 점이 꼽힌다. 지정 은혜제 이전은 세금을 회피할 목적으로 아이의 수를 줄이고 신고했지만, 인두세가 폐지되고 아이의 출생을 숨길 필요가 없어지고 자유롭게 출산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됐다. 또 옥수수, 감자, 땅콩 등 새로운 작물이 보급되고 굶주리지 않고 사망률이 떨어지고 인구 증가를 유발한 요인으로 지적된다.
인구 증가는 심각한 문제를 초래했다. 첫째, 급격한 토양 황폐화를 가져왔다. 산림 벌채와 토양의 대량 유실이 발생하고 기후 변화에 대한 대응력이 약해지며 반복적인 홍수와 가뭄을 겪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두 번째는 바로 임금 하락이다. 사람이 많다 보니 적은 돈으로도 일하는 사람들이 넘쳐났고, 이는 자연스럽게 임금 하락으로 이어졌다. 이는 나중에 산업혁명을 가로막는 결과를 초래하게 됐다.
그동안 전쟁과 돈의 상관 관계에 대해서 유럽과 중국을 오가며 보고 왔다. 여기까지의 이야기에서 몇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금리가 높은 나라는 투자처로서 적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네덜란드와 영국 등 인구가 적은 나라가 패권을 쥘 수 있었다 최대의 이유는 재정적 신뢰를 바탕으로 국민으로부터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한 것이다. 국가와 개인 신용도가 낮은 때 금리는 높아진다. 그리고 금리가 높은 나라나 기업 또는 개인 만큼 불확실성이 높아 자본 시장이 별로 발달하지 않다고 본다. 2)화폐 공급이 줄어들자 경기가 나빠진다. 스페인과 중국의 이야기에서 보듯 통화 공급이 줄때 심각한 위기가 온다는 것이다. 은행 예금이 급감하면 기업과 가계 대출금을 회수할 수밖에 없다. 빚을 갚지 못하는 기업과 가계는 파산을 면하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전체 경제 불황과 대규모 실업 사태를 유발한다.국가 간 전쟁을 비롯한 세계사의 큰 흐름이 그렇게 흐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경제적인 원인부터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됐다. 학생 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것 없는 역사의 보다 진실한 모습을 만나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책에 나오는 사건이 시간 순서에 흐르는 각 사건 간의 관련성을 통하여 말을 잇는 구성했다면 더 몰두한 것 아니냐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 대신 이 글에서는 그런 아쉬움을 더 보완하기 위해서 재구성하려고 노력했다.#돈의 역사#50대 사건#홍·츄은욱#로크 미디어#경제#역사#독서#서평. 책을 읽는다# 쓰는 법#금리는 물가#왜구#조세 개혁#화폐 공급#경기 회복]” 대항해 시대””글로벌#경제 위기는 금융 위기#산업 혁명”’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 저자 홍충욱 출판록미디어 출시 2019.04.24.첫번째문장-전쟁과돈의상관관계,두번째문장-인구가산업혁명에미친영향,세번째문장-세계대공황과금본위제도,네번째문장-한일경제※ 각종 리뷰는 개인적인 생각을 스스로 정리하기 위해 작성하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기 때문에 낮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소 못보시는 점이 있더라도 정중히 양해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내 글이 유익했다면 이웃추가, 공감, 댓글 부탁드립니다.미리 감사합니다. 라이프 혁명 명품 인생 프로젝트 Written by 세미콜론;미리 감사합니다. 라이프 혁명 명품 인생 프로젝트 Written by 세미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