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황제 ‘가수 나훈아’ 간 다병 습격 사건

나훈아는 1947년 2월 11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최홍기다. 서라벌예고 1학년 때인 1966년 ‘천리길’을 발표하고 공식적으로 가요계에 데뷔한다.

이후 ‘사랑은 눈물의 씨앗’, ‘청춘을 돌려줘’, ‘잡초’, ‘대동강 편지’, ‘무시로’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대부분의 히트곡은 본인이 작사·작곡했다.

나훈아는 뛰어난 가창력과 독특한 굽힘 창법으로 큰 인기를 끌며 카리스마 있는 무대 장악력으로 청중을 압도했다. 특히 남진과 함께 1970년대 ‘세기의 라이벌 대결’을 펼치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러던 1972년 6월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 자리)에서는 한국연예단장협회 주최로 ‘올스타쇼’가 열렸다.

공연 마지막 순서로 나온 나훈아가 세 곡을 부르자 객석에서 앙코르 요청이 이어졌다. 나훈아는 이에 답하고 ‘다방의 고독’을 부르기 시작했다.

왼쪽(예아라 예소리 제공), 오른쪽(동아일보 기사사진 캡처) 무대에 있는 나훈아는 강한 조명을 받았다. 1절이 끝나자 다시 장내는 박수와 환호로 떠나는 듯했다. 꽃다발 손수건 심지어 구겨진 팬레터까지 쉬지 않고 무대에 날아들었다.

관객들은 일어서서 두 팔을 휘둘러 발을 동동 구르며 목이 터져라 환호성을 질렀다. 나훈 만세도 폭발했다. 팬들의 환호에 손을 흔들던 나훈아가 다시 2번을 부르기 시작한다.

그 커피숍에 들어갈 때 내 가슴은 설레고 있었다 기다리는 그 순간만큼은 꿈처럼 달콤했다.

이때였다. 한 남성이 재빨리 무대로 뛰어올랐다. 그의 오른손에는 깨진 사이다병이 움켜쥐고 있던 강한 빛 때문에 객석을 알아볼 수 없었던 나훈아는 팬들이 악수를 청하러 다가오는 줄 알았다.

나훈아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마이크를 왼손으로 옮기고 악수를 하려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순간 남성은 나훈아의 왼쪽 뺨을 깨진 사이다병으로 강하게 찔렀다. “으악” 나훈아는 한마디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왼쪽 뺨을 감쌌다.

나훈아는 본능적으로 돌아서며 괴한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반격당한 남자는 쓰러져 무릎을 꿇는 것 같았지만 다시 병을 들고 조금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나훈아는 “불을 켜라”고 외치고, 이때 괴한이 나훈아의 목덜미를 공격한다. 나훈아의 몸에서 나온 핏줄이 관중석까지 튀었다.

괴한의 등장으로 무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객석에서는 나훈아 팬들이 “쟤 잡아라”고 외치며 무대 위로 뛰어들었다.

질서 유지를 위해 행사장에 배치돼 있던 경찰관들이 쫓아와 괴한을 제압하고 수갑을 채우고 끌어내리면서 상황은 종료됐다. 불과 5분 사이에 벌어진 끔찍한 사건이었다.

나훈아는 곧장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왼쪽 볼에 타원형으로 찢어진 살이 금방 떨어지도록 매달려 있었다. 잠시 후 구급차가 도착했고, 나훈아는 인근 신경외과 병원으로 옮겨져 76바늘을 꿰매는 중상을 입었다.

나훈아는 “병원에 입원하라”는 것도 뿌리치고 다음날 새벽 집으로 향했다. 며칠 후면 얼굴에 붕대를 감은 채 지방 공연에 나서기도 한다. 나훈아의 프로정신을 엿볼 수 있다.

범인은 종로경찰서로 연행돼 조사를 받았다.

그는 마땅한 직업이 없는 김은철(26)이었다. 김씨는 범행 동기에 대해 “인기 연예인을 찔러 세상을 떠들썩하게 해서 나도 유명해지고 싶었다”며 “사실 영화배우 신성일을 찌르려고 했는데 이날 나오지 않아 나훈아를 선택했다”고 진술했다.

김은철은 부모의 얼굴도 모르는 사생아였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 할머니와 함께 살다가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홀로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구두닦이, 식당 종업원, 각종 공사현장에서 일하며 돌아다녔다.

범행 전에는 지하철 공사장에서 일을 그만두고 놀았다. 김은철은 살인미수 혐의로 기소돼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사건 이후 연예계 안팎에서는 ‘남진 배후설’이 퍼졌다. 이와 관련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김은철은 사건 전날 새벽 남진을 만나기 위해 그의 숙소를 찾는다.

후배(매니저 추정)가 이 같은 사실을 알리자 남진은 그냥 돌려보내라고 했다. 김은철은 매니저와 티격태격하며 완강하게 방으로 들어간다.

남진과 만난 김씨는 “나는 전과 4범”이라며 “돈존을 내라”고 요구했고, 남진은 이를 거절했다. 그는 다시 돈이 필요한데 좀 주겠나. 라이벌 나훈아를 해치우니 보상하겠느냐고 따졌다.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한 남진은 김은철을 그대로 돌려보냈다. 이는 남진에게 오래도록 재앙의 근원이 된다. 남진 배후설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여러 정황으로 미뤄 남진 관련 가능성은 희박하다. 본인도 여러 차례 적극적으로 부인했다.

나훈아 역시 여론과 팬들이 남진을 의심하자 “아니다”고 말했다. 다만 남진이 나훈아 병문안을 오지 않은 것과 김은철이 찾아왔을 때 적극적으로 만류하거나 사전에 나훈아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매우 서운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 이후 남진은 김은철에게 시달린다.

김은철은 출소 후 남진을 따라다니며 “먹고 살 돈을 달라”고 요구했고, 남진이 “언제 내가 나훈아를 찔러 달랬냐”고 하자 “내 신앙으로 말했다. 밑천인 줄 알았다고 괴롭혔다.

결국 김은철은 공갈 혐의 등으로 다시 복역하게 된다. 1980년 겨울에는 남진 목포의 생가에 불을 질러 100여 평을 태웠다고 한다. 김은철의 최대 피해자가 나훈아였다면 남진은 두 번째 피해자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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