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장소, 환대』 : 3장 사람의 연기/수행 – (2) 명예와 존엄

김현경은 모욕을 명예훼손에 국한해 좁은 개념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모욕을 보다 포괄적인 개념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것을 존엄과 관련시키면서도 감정처럼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처럼 객관적으로 기술 가능한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상적인 의사소통의 의례적 성격을 강조하는 고프먼의 견해는 모욕의 사회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4장 전체를 모욕을 더 깊이 설명하는 데 할애한다. 3장은 논의의 구조, 사용하는 개념어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래서 더 어렵게 느껴진다. 난해함을 조금이라도 제거하기 위해 지나치게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은 누구나 사회라는 연극 무대에서 가면을 쓴 배우다. 예를 들어 교사는 무대에서 교사 역할을 한다. 그런데 배우들이 가면을 벗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사회적 자신의 역할을 벗어던지면 남는 것, 즉 가면 뒤의 얼굴은 무엇일까? 연극 무대 위에서는 얼굴을 볼 수 없다. 연극 무대에는 가면을 쓴 배우만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대에서 내려서 가면 벗으면 얼굴이 보이나? 그때는 관객한테 얼굴이 안 보여. 따라서 얼굴은 가면을 쓰게 하는 배경과 조건에 그칠 수밖에 없다.무대에서는 가면만이 명예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가면과 얼굴을 대립적으로 바라본다. 가면을 위해 얼굴을 희생하는 경우도 있다. 즉 좋은 교사가 되려면 자신의 진짜 모습을 숨기고 억제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래서 교사로서 명예를 얻더라도 정작 자신은 불행해질 수 있다. 과거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명예를 얻는 것은 곧 자신의 정체성의 실현이자 성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명예와 자아정체성을 분리시켜 버렸다.김현경은 이처럼 명예와 존엄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을 비판한다. 나는 교사로서 다른 사람과 교류한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사회 밖으로 나가 철저히 고립된 한 사람이 된다. 이것이 이분법적 구분이다. 그러나 제3지대가 있다. 버스 정류장과 같은 공간에서 나는 교사가 아니다. 상대방이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며 예의를 차린다. 그렇게 서로 규범을 지키면서 상호작용을 한다. 또한 교사로서의 내가 가진 명예만이 공격받는 것은 아니다. 명예에 대한 공격, 즉 모욕은 교사인 나에게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인종차별을 당하고 모욕을 당할 수도 있다. 나의 사회적 역할과 관계없는 나의 정체성 자체가 모욕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존엄에 대한 모욕은 개념적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모욕의 개념이 너무 좁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욕의 개념을 존엄과 관련짓는 동시에 감정처럼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처럼 객관적으로 기술 가능한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바로 이런 논의를 제4장 모욕의 의미로 시도한다.

이런 이유로 맛 킨 타이어는 고후만이 자아를 그냥”역할이라는 옷을 나오는 옷걸이로 다룬다”(92쪽)고 비판한다. 여기서 “자”라는 얼굴이다. “옷”이란 가면이다. 맛 킨 타이어의 비판은 고후만이 가면만 중시하고 얼굴은 가면을 위해서 필요한 부수품 정도밖에 없다고 봤다는 것이다. 맛킨 타이아는 고후만 이론을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과 비교한다. 고후만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잘 수행함으로써 명예를 얻다. 교사로서의 명예, 부모로서의 명예, 친구로서의 명예를 얻는다. 그러나 이들의 명예는 분리하고 있다. 예를 들면 교사로서 존경 받는 사람이 부모로서는 낙제점을 받을 수 있다. 충실한 부모이지만 좋은 친구가 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맛 킨 타이어는 이런 일관성, 통합성의 결여가 문제이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에 명예는 “어떤 사람이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덕을 드러냈을 때 그에게 주어진다.”(93쪽)교사로서 명예를 얻은 사람들은 그가 자신의 덕을 교사라는 역할과 행위를 통해서 발현된 사람이다. 비유하면 옷이 멋있게 보이는 것은 그 옷이 걸린 옷걸이가 좋은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중요한 것은 옷이 아닌 단식이었다. 김·현경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예 개념이 쇠퇴한 이유에 대한 피터·버거의 이론을 이끌어 온다. 그리고 다음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현대의 새로운 도덕은 참으로 존엄성의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 명예 관념이 전통적인 사회 질서 및 그 가운데 개인이 갖는 위치 감각에 뿌리박고 있다면”존엄은 명예와 대조적으로 사회적으로 부과된 모든 역할과 규범을 벗어 던진 내면적인 인간성과 관련하고 있다. 그것은 자아 자체에 고유의 것이며, 그 사회적 지위에 관계 없이 개인에게 고유의 것이다.’94~95쪽

이렇게 해서 명예와 존엄은 서로 대비된다. 과거 사회는 명예를, 현대 사회는 존엄을 중시한다. 현대인들은 그의 조상과는 정반대의 방법으로 자신을 발견한다.명예의 세계에서 개인은 역할 속에서 진정한 정체성을 발견한다.그 역할에서 도망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것과 같다.존엄의 세계에서 그는 사회가 부과한 다양한 역할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킴으로써 진정한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다.역할은 단순한 가면이며 그를 환상과 소외와 자기 기만에 빠뜨린다.

훌륭한 교사로 인정받아 명예를 얻었다고 치자. 그는 나는 훌륭한 교사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한다.나의 덕은 훌륭한 교사로 완성된다.반면 현대사회에서 훌륭한 교사로 인정받는 것이 무조건 명예가 될 수는 없다. 명예로운 교사가 되기 위해 한 행위에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오히려 훌륭한 교사가 되기 위해 내 욕망을 숨기고 자유를 포기해야 했다. 훌륭한 교사로서의 명예를 얻기 위해 나는 나 자신을 포기하고 부정한 것이다.

교사로서의 명예는 나의 자아를 부정하고 희생함으로써 얻은 대가이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 자기 부정과 희생을 거듭하다 결국 부모의 역할을 벗어 던지고 자신을 찾는 얘기도 많다. 이런 사회(적 역할, 가면)와 자아(정체성, 얼굴)의 불화가 현대 사회가 경험하는 근본적인 문제이다. 맛킨 타이아는 세계와 자아의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적 덕으로 회귀하고 있다. 덕을 추구하는 것은 단지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덕의 추구는 자아의 가능성을 역할을 통해서 실현하는 것이다. 즉 훌륭한 교사들은 자신의 자아 속에 존재하는 교사로서의 덕목을 충분히 발휘하고 도달한 결과다. 이로써 세계와 사람의 대립은 극복된다. 김·현경은 맛 킨 타이어의 덕 이론에 더 이상 파고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번 장의 목표가 “덕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명예와 존엄의 대립을 비판하는 데 있다”이다. 김·현경이 보기에는 가면과 얼굴, 명예와 존엄을 이분 법적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이 이분법의 문제점은 구조와 상호 작용 질서를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사회는 구조, 즉 역할의 체계와 동일시되고, 역할의 옷을 벗는 것은 사회 밖으로 나오는 것과 같다.그 결과 개인은 구조가 요구하는 역할을 수행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거부하고 사회 밖으로 나가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즉, 이 모델은 행위자에 순응 주의인지 내면에 잠 자는 것이냐는 양자 택일만 남긴다.100쪽

그러나 사회적 실천 속에는 역할 수행과 관계 없는 순수한 상호 작용의 층위가 있다. 버스 정류장에 늘어설 때, 사람들은 규칙을 지키고 있다.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예의 바른 무관심을 보이면서 남의 몸을 둘러싼 공간을 침범하지 않도록 노력하다. 지위와 역할이 다른 개인이 동등한 권리를 가진 존엄한 존재로 사회 공간 안에 현상하는 것은 이런 의례(버스의 줄)에 힘입어 있기 때문이다.그들은 의례적인 실천의 토대에 있는 규범을 단순히”진정한 자아”과 대립하고 외적으로 강제적인 힘으로 볼 수 없는 역할을 괄호 안에 넣은 상호 작용과 그것을 조율하는 규범의 존재에 버거가 “존엄의 세계”로 명명된 현대 사회의 특징이다.103쪽

명예와 존엄의 이분법 비판 버스정류장에서 나는 교사도, 부모도, 친구도 아니다. 그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학생도 아이도 친구도 아니다. 그래도 예의를 지키고 상대방을 존중한다.이때 나와 사람들의 역할을 괄호 안에 넣어둔 것과 같다. 그러면서도 상호작용과 규범의 준수가 일어난다. 버스 정류장에서 이처럼 서로 존중하고 예의를 지키는 이유는 함께하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어떤 직업이나 지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그 자체로 존중해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김 현 타카는 명예와 존엄의 갈등을 또 하나의 이유로 비판한다. 버거는 명예를 공격하고 모욕을 줄 수 있지만, 존엄은 표현적 질서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표현을 통해서 남의 존엄을 훼손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교사로서의 명예를 공격하고 모욕을 줄 수 있다. 잘나게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입장을 지키기 위해서 늘 전전긍긍하는 공무원에 지나지 않으면 모욕할 수 있다. 교사의 명예는 우수한 교수 능력, 교육학에 대한 지적 탁월성, 학생을 잘 다루는 관련 기술 등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모욕하기 어렵다. 존엄성이라는 것이 외부적으로 어떻게 표현되는지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이 버거의 생각이다. 그러나 김·현경은 버거의 설명이 틀린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어 공민권 운동은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에 대한 모욕에 대한 저항이다.

김·현경은 모욕을 명예 훼손에 한정하고 좁은 개념으로 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모욕을 보다 포괄적인 개념으로 만들려면 그것을 존엄과 관련시키면서도 감정처럼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처럼 객관적으로 기술 가능한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의례적 성격을 강조하는 고후만의 견해는 모욕의 사회적 의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래서 4장 전체를 “모욕”에 대한 설명하는 데 할애. 제3장은 논의 구조, 사용하는 개념어가 복잡하게 얽히고 있다. 그래서 더욱 어렵게 느껴진다. 난해함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서 지나치게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은 누구도 사회라는 연극 무대로 가면을 쓴 배우이다. 예를 들면, 교사는 무대에서 교사의 역할을 하다. 그런데 배우들이 가면을 벗으면 무엇이 일어날까? 사회적 역할을 벗어 던지면 남는 것, 즉 가면 뒤의 얼굴은 무엇일까? 연극 무대 위에서는 얼굴을 볼 수 없다. 연극 무대에 가면을 쓴 배우만이 탈 수 있는 때문이다. 그럼 무대에서 내리고 가면을 벗는 얼굴이 보일까? 그때는 관객에게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얼굴은 가면을 떨도록 하는 배경과 조건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무대에서는 가면만 “명예”를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가면과 얼굴을 대립적으로 바라보다. 가면의 때문에 얼굴을 희생하는 경우도 있다. 즉, 좋은 교사가 되려면 자신의 진짜 모습을 숨기고 억제하는 대가를 내야 한다. 그래서 교사로서 명예를 얻고도 정작 자신은 불행하게 될 수 있다. 과거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명예를 얻는 것은 즉 자신의 정체성의 실현인 성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명예와 자아 정체성을 분리시켰다.김·현경은 이렇게 명예와 존엄을 이분 법적으로 나눌 것을 비판한다. 나는 교사로서 타인과 교류한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사회의 밖에 나가서 철저히 고립된 한 사람이다. 이것이 이분법적 구분이다. 그러나 제3의 지대가 있다. 버스 정류장과 같은 공간에서 나는 교사가 아니다. 상대가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없는데도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되 예의를 지키다. 그렇게 서로 규범을 지키면서 상호 작용을 한다. 또 교사로서 나의 명예만 공격하는 것은 아니다. 명예에 대한 공격, 즉 모욕은 교사인 나한테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인종 차별을 받고 모욕당할지도 모른다. 나의 사회적 역할과 관계 없는 나의 정체성 자체가 모욕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존엄에 대한 모욕은 개념적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모욕의 개념이 너무 좁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욕의 개념을 위엄과 연관 지면 동시에 감정처럼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처럼 객관적으로 기술 가능한 대상으로 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런 논의를 제4장 모욕의 의미에서 시도한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